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호르스트 베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Bundesarchiv_Bild_146-1978-043-14%2C_Horst_Wessel.jpg|width=300]] 의회의원이 되었지만 괴벨스가 하는 일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나치당 의원들이 죄다 그러하듯이 괴벨스는 '''의정활동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의원직과는 별도로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도 당선되었는데, '''단 한 번도''' 의회 연설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국회에선 공산당 의원 [[발터 울브리히트]]와 [[Rap|랩]]배틀을 몇 번 벌인 적은 있었다.] 그의 본 무대인 거리 선동과 <공격>지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신문이야 관구 사무장에게 일임한 후 간간히 논평이나 냈고, 괴벨스는 주 전공인 선동으로 공산당 이론가 선동가들과 [[힙합]] 래퍼들처럼 길거리에서 청중들 앞에서 공개 랩배틀을 벌이거나 코에이 삼국지서 [[설전]]하듯이 맞불 집회와 공개 토론으로 깔아뭉개는 아가리 배틀 능력을 과시했다. 정적들이 자신에게 붙인 ''''베를린 최고 악당' '''이란 별명은 오히려 자랑스레 홍보용으로 쓰고 다녔다. 한편 이 시기 쯤에는 바이마르 공화국도 슬슬 막장테크를 타기 시작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 대공황]]이었다. 1929년 10월의 미국 증시 붕괴 이전인 1928년 말부터 사실 전세계 실물 경기 지표는 꼴아박고 있었고, 독일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경제난으로 인해 실업과 노사분규가 증가하여 마찰은 잦아졌고, 결국 1929년 5월 1일 [[노동절]]에는 공산당 폭동이 발생한다. 괴벨스는 이 폭동을 두고 이슈 선점에서 뒤쳐졌다며 처음에는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결과적으론 나치당에 매우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됐다. 수도 베를린과 괴벨스의 고향 쪽 서부 독일 노이쾰른 지역에서 폭동 진압 시도에 대해 공산당 깡패들이 권총질을 하면서 저항했고, 이에 경찰들과 시가전이 발생해서 프로이센 경찰은 장갑차와 기관총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던 것. 그 결과 공산당 폭도, 민간인과 경찰을 포함해 4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공산당 깡패들 1,200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공산당 조직은 불법화되었고, 그 결과 조직을 잃은 공산당 깡패 중 상당수가 돌격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미미하던 나치당 깡패 숫자가 이 일로 크게 보강되었고 공산당 금지령으로 길거리에서 나치당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된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호르스트 베셀]]은 앞서 19세 때 괴벨스의 애국적 연설에 감격해서 나치당과 돌격대에 가입한 '전사'로 3년이 지난 후 돌격대 '[[소위]]'로 베를린 돌격대에서 일개 [[중대(군대)|중대]][* 물론 돌격대 중대라봤자 규모는 총 열네댓 명이었다.]를 이끌 정도로 성장했다. 일반적으로 사회 하층민 출신인 다른 돌격대원들과 달리 베셀의 출신 성분은 이질적이었다. '[[목사]]'의 아들에다가[* 나중에 장례식 규모를 두고 유족들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인맥이 있어 면담을 시도할 정도로 명망있는 목사였다.]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 현재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본(독일)|본]] 대학(Rheinische 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Bonn).] 법과대학'에 입학한 인재로 나치당에서도 차기 지도자가 될 '''유망주'''로 일찌감치 선발, 중앙당에서 마련한 나치당 지도자 양성 캠프에도 보낼 정도였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공산당 깡패들을 박멸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는데, 살해되기 며칠 전에도 소속 부대를 이끌고 공산당 깡패들을 습격해서 4명을 병원 실려갈 정도로 두들겨 팼었다. 그 결과 공산당 무장 깡패조직 '붉은전사동맹'의 척살 리스트 순위에 올라가게 된다. 때마침 베셀은 기거하던 집의 주인과 월세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죽은 남편이 공산당원이었던 집주인 여자는 공산당 패거리에게 '''손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공산당은 처음엔 집주인이 [[기독교]]인인 점을 들어서 거절했지만 나중에 손 봐줄 대상이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얼씨구나하고 수락했다. [[창녀]] 출신 애인과 방 안에 있던 베셀은 갑자기 쳐들어온 공산당 깡패들에게 머리에 총을 맞았고 공산당에선 이를 '나치당원 [[포주]]와 [[기둥서방]] 사이의 싸움'으로 위장, 폄하했지만 괴벨스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삼는다. 호르스트 베셀 사건 몇 달 전에 젊은 나치당원이 죽은 상태로 발견된 적이 있었고, 당시 괴벨스는 이를 '공산주의자의 테러'로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했지만 베를린 경찰의 조사 후 발표 사인은 '자살'이었고 따라서 선동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때 괴벨스는 유대인 언론들의 모략 드립을 치면서 [[정신승리]]나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공산당 조직에서는 범인들을 숨겨주려 했지만 공범 중 한 명이 도피 도중에 경찰에 체포되자 사건의 전모를 자백했으며, 그 결과 체포된 공산당원 겸 사창가 포주였던 알브레흐트 횔러[* 이 살인죄로 결국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돌격대 대원들이 불법으로 감옥에서 끌어내 무참하게 살해한다.]를 베셀의 애인이 남자친구를 쏜 범인이 맞다고 지목한 것. 어쨌든 백주대낮에 총기를 이용한 정치적 테러가 일어났고 나치당이 이 사건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괴벨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선동을 시작했고, 괴벨스가 유대인 언론이라 질타했던 주류 언론들도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호르스트 베셀은 긴 시간에 걸쳐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괴벨스는 <공격>지에서 베셀의 사투 과정을 생중계했다. 소뇌에 박힌 총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괴벨스의 뛰어난 독일어 작문 실력으로 눈물콧물 쏟아내게 포장하고 공산당 살인마들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패야 된다고 규탄했다. 한때 범인들을 실드쳤던 공산당 신문은 엄청난 [[역관광]]을 당해 여론의 질타까지 받아야 했고, 주류 언론에서도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베셀을 '애국 청년'으로 포장하는 것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국 베셀은 한 달 반의 사투 끝에 사망했고 장례식이 치뤄졌다. 이때 장례식엔 괴링과 괴벨스는 물론이고 독일의 전 황제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까지 참가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베르크호프 별장으로 놀러가기로 선약이 되어 있어서 참석을 단칼에 거절했다. 여담으로 빌헬름 2세는 아들들이 나치빠인 걸 대단히 안 좋아했다고.] 장례식을 거의 [[국장]]급으로 치루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장례 행렬을 통해 공산당이 깽판을 칠 걸 예상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은 김에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저질렀다. 괴벨스는 베셀을 마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올 만한 [[백치]], [[노동자]], 창녀들 사이로 ''''스스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임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회주의자'''요 이상주의적 공상가'라고 포장했다. 또한 순교자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전 독일에 10년 안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